신용회복경험담
흙 묻은 손으로, 다시 삶을 일구고 있습니다
-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07.1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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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채무 발생 전의 일상적인 삶 (약 300자)
남들 보기엔 소박한 시골 생활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정겨운 일상이었습니다. 새벽이면 밭으로 나가고, 해 질 녘이면 마을회관에 들러 동네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는 삶.
남편과 함께 일하며 두 아이를 키워냈고, 아이들은 도시로 나가 공부하고 직장도 잡았습니다. 비록 가진 건 많지 않아도 ‘이만하면 잘 살았다’ 싶었어요.
하지만 부부 사이란 게 꼭 손발처럼 맞는 건 아니더라고요. 긴 시간 쌓인 감정의 골은 결국 이혼이라는 결말로 이어졌고, 그때부터 제 인생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2. 전개: 채무 발생과 악화 과정 (약 500자)
이혼 과정에서 가장 버거웠던 건 재산 분할과 위자료 문제였습니다. 남편과 공동명의로 된 밭과 주택 일부를 두고 법적 분쟁이 이어졌고, 결국 조정 끝에 제가 현금으로 분할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어요.
그때 은행에서 5,000만 원, 카드사에서 2,800만 원 가량을 빌리며 총 7,800만 원의 채무가 생겼습니다. 농사로 벌어들이는 돈은 계절 따라 다르다 보니, 꾸준한 상환이 어려웠어요.
처음엔 농협 대출 상환만 간신히 하면서 버텼지만, 작년 여름 태풍 피해로 수확량이 뚝 떨어지면서 급격히 상황이 악화됐습니다. 카드값은 연체되기 시작했고, 은행에서는 연체이자까지 붙어 점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어요.
사실 빚보다 더 힘들었던 건 주변 시선이었습니다. 작은 동네라 소문도 빠르고, “남편하고 헤어졌다더라”, “돈 문제로 힘들다더라” 하는 얘기가 제 귀에도 들려왔죠.
3. 위기: 개인회생 결심까지의 상황 (약 400자)
결정적인 계기는 한겨울, 난방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하던 날이었어요. 통장엔 5만 원이 남아 있었고, 채권추심 전화는 하루에도 세 번, 네 번씩 걸려왔습니다.
그날 저녁, 도시에 있는 큰아들에게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울컥하더라고요. 그동안 아이들한테는 아무 얘기도 못 하고 있었거든요.
통화 끝에, 아들이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엄마, 개인회생 알아봤어? 혼자 다 감당할 일이 아니야.”
처음엔 ‘내가 무슨 회생이냐’, ‘나라가 나 같은 사람도 도와주겠냐’ 하는 마음이었지만, 며칠 동안 고민하고 결국 읍내 상담소를 찾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손이 떨렸지만, 상담사가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걸 들으면서 처음으로 마음이 놓였어요.
4. 해결: 개인회생 진행 과정 (약 500자)
상담 후, 서류 준비와 법원 신청까지 약 한 달이 걸렸습니다. 저는 소득이 일정하지 않은 농업 종사자이기 때문에, 최근 1년간 농작물 판매 내역, 통장 거래 내역, 영농일지까지 모두 제출해야 했어요.
다행히 작물 출하 시점과 금액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어, 법원에서도 제 수입을 인정해줬고, 월 28만 원씩 3년간 납부하는 조건으로 개인회생 인가를 받았습니다.
법원에 직접 출석했던 날은 아직도 기억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판사님 질문에 답하면서,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고, 동시에 ‘이제 진짜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도 들었어요.
서류 과정도 쉽진 않았지만, 제가 살아온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빚은 죄”처럼 여겨왔던 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요. 회생은 회피가 아니라, 책임 있게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더라고요.
5. 결말: 현재의 변화와 희망 (약 300자)
지금은 매달 변제금을 빠짐없이 납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농사 규모는 줄였지만, 대신 꾸준한 직거래처를 만들어 조금씩 안정적으로 수입을 만들고 있어요.
무너졌던 자존감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시 내 힘으로 삶을 이어간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제는 절실히 느껴요.
앞으로 3년, 더는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갚아가며 살아보려 합니다.
혹시 저처럼 이혼이나 예상치 못한 사정으로 채무를 떠안게 된 분이 있다면 꼭 전하고 싶어요. 혼자 견디지 마세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고,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저도 지금 그렇게,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