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회복경험담
평범한 가장의 삶,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책임
-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07.0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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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평범한 가장의 삶,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책임
저는 올해 59세, 오래 전까지는 지방의 제조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근무하다 3년 전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가족은 아내와 성인이 된 두 자녀, 그렇게 평범한 가장으로 묵묵히 살아왔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매달 들어오는 월급으로 집안 살림 꾸려가며, 나름 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는 늘 미안함이 컸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이 해외 대학에 합격했을 때,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돈은 나중에 갚으면 되지"라며 대출을 받아 뒷바라지를 시작했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모든 시작이었습니다.
2. 전개: 유학비와 생활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처음에는 은행 학자금 대출 3천만 원으로 시작했지만, 외화 송금, 학비, 기숙사비, 생활비 등 지출이 계속 늘었습니다. 아이가 생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에 신용카드 현금서비스와 카드론까지 이용하게 됐죠. 당시에는 “어떻게든 갚을 수 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퇴직 후에는 말 그대로 수입이 반 토막이었습니다. 퇴직금 대부분은 이미 유학비로 썼고, 저는 하루 네 시간짜리 창고관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월수입은 130만 원 남짓. 그런데 월 이자와 원금 상환에만 70만 원 이상 나가니, 남는 게 없었습니다. 카드 연체가 시작되면서 신용등급도 추락했고, 가족들에겐 이 사실을 차마 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3. 위기: 참았던 눈물,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연 날
결정적인 순간은 작년 겨울, 난방비조차 카드 리볼빙으로 결제해야 했던 때였습니다. 눈 오는 날, 아내가 말없이 전기장판에 의지해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상황을 고백했습니다. 아내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곧 “이제 우리 같이 해결하자”고 말해줬습니다. 그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 지역 상담센터를 통해 개인회생 제도를 알게 되었고,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상담실 문을 열던 날은 정말 떨렸습니다. 부끄럽고 초라한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었지만, 상담사는 조용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며 “이건 재기의 기회입니다”라고 말해줬습니다. 그 말이 큰 위로가 됐습니다.
4. 해결: 새로운 길, 회생이라는 제도
상담 후 서류를 모으고 정리해 신청을 접수했고, 법원의 개시 결정은 약 2개월 후에 나왔습니다. 이후 3개월간 보정 기간을 거쳐 최종 인가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인가까지 총 5개월 정도 걸린 셈입니다. 법원 출석은 간단한 질의응답 정도였고, 연령과 소득 상황을 고려해 무리 없는 조건으로 변제계획이 승인되었습니다.
최종 인가된 변제 조건은 월 22만 원씩, 36개월간 변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동안 연체이자와 복잡한 채무 때문에 한 달 수입의 절반 이상이 빠져나갔던 저로서는,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습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식비를 아끼고, 외출도 줄이며 지출을 관리했습니다. 한때는 커피 한 잔 사는 것도 망설였지만,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싸고, 공원 산책으로 여유를 찾으며 차츰 생활도 단순해졌습니다.
5. 결말: 나이 들어 다시 배운 삶의 교훈
지금은 개인회생 변제 1년 차입니다. 아직 갈 길은 남았지만, 마음은 훨씬 가볍습니다. 카드사나 채권사 전화에 벌벌 떨던 날들도 지나갔고, 신용회복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가족들과 솔직해졌다는 것입니다. 숨기지 않고, 같이 해결하려 하니 관계도 더 단단해졌습니다. 아이들도 해외에서 잘 적응하고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 저처럼, 자녀 뒷바라지나 가족을 위한 선택으로 채무에 몰린 상황이라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개인회생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나이 때문이라며 포기하지 마세요. 늦은 나이에도 다시 설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저처럼 말이죠.